모던타임즈 3
2011
현홍














artist statement
1.마주보는 두 개의 얼굴.
환경과 개체(인간)는 함께 돌아가는 두 개의 톱니바퀴입니다. 그래서 나(우리)는 지금의 시대가 만들어 놓은 온갖 유무형의 사회적 환경과 뚜렷한 대응관계에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는지, 그 얼굴을 쳐다보고 성찰하는 일은 당연하고 가치있는 작가의 과제입니다. 모던타임즈(현대)라는 주제로 이번에 세번째 시리즈를 마무리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시리즈는 딥틱 작업이었습니다. 환경과 그 내부를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시각적 유사성’을 통해 물성화되어가는 인간성을 증명해보고자 했습니다. 이번 작업은 단사진입니다. 지난 작업들이 비유적 표현이었다면 이번엔 상징입니다. 환경과 소비, 화폐, 미디어, 음식,기억, 자원등 현대가 그려내고 있는 다양한 얼굴들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을 담아냅니다. 모던타임즈 작업은 지금, 현대에 대한 나의 감각입니다.
2.상수와 변수.
작품의 생산자만큼이나 수용자 역시 작가만큼이나 창의적입니다. 재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으로 따지면 작품 감상은 수용자 고유언어로의 번역에 가깝습니다. 즉, 보는 이들도 작가입니다. 더욱이, 감상을 위해 동작하는 관람자의 감성 또는 느낌이란(이성과는 별도로) 총체적인 것이어서 작품 수용 도중에 어떤 감각이 끼어들지 모르는 일이죠. 작가가 그것을 다 제어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즉 생산과 수용을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하는 데엔 전 반대입니다. 최소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작가를 제외하고, 또는 작가의 것(의도, 메세지, 그의 감성 등)을 배제하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저는 모더니스트입니다.
예술은 작가와 재현할 대상 사이의 관계식에서 시작합니다. 작가는 물질을 질료로 사용하고 그 둘(작가와 물질)간의 관계가 작품의 출발이 됩니다. 그 관계식에서의 상수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수용자에게 전해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변수는 감상자의 것으로 자유로운 해석의 부분이죠. 그 상수는 온전히 작가의 변이고 그들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상수마저 감상자에게 내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죠.
3.문학적 사진. 이미지를 글자처럼 쓰기.
그렇다면, 이번 작업에서 저의 상수는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요? 잘 알려진대로, 이미지를 문자처럼 쓸 수 있다는 생각은 기각된지 오래입니다. 문자의 단위(어휘)와 그 단위들의 연결 규칙(문법)이 이미지엔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문학에서의 상징처럼 이미지에서 또한 상징을 얘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작가가 이미지안의 오브제들에 주입한 의도(상징)를 감상자가 그대로 전달 받을 확률은 거의 희박합니다. 그러나, 상수가 ‘단순하고 명확한 재현’이라면 오독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사과를 찍은 사진은 사과인거죠. 일단 감상을 사과에서 시작할 가능성을 높힙니다.
이번 작업은 ‘문학적 사진’입니다. 이런 용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문학작가들이 문장구성을 위해 어휘들을 수집하고 다시 미학적으로 배치하듯이, 난 내가 하고픈 말들을 하기 위해 대상들을 촬영하고 임의대로 재구성합니다. 단 오브제들을 최소화하고 명확히 합니다. 마치 짧고 아름다운 싯구처럼. 그리고, 남은 문제. 그럼 내 생각이 맞느냐, 틀리느냐.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지요. 그러나 미안합니다. 난 과학자가 아닙니다. 내 이야기는 증명되어야할 가설이 아닙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예술가에게는 틀릴 자유가 있습니다. 당신이 동의하는 만큼만 내가 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