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key
2005-2006
강홍구













artist statement
사람들은 이사를 가면 무엇을 버리고 갈까. 그런 통계는 없으니까 빈집들을 돌아다니며 눈으로 대강 살펴보고 어림짐작 해 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침대와 장롱 같은 가구, 그다음이 가전제품, 다음은 비디오와 어학 테이프, 오래된 그릇들, 그리고 장난감들이다. 플라스틱 자동차가 폐차장처럼 모여 있다. 그 옆에서 장난감 집을 발견한다. 노란 벽체와 분홍색 지붕, 정면에는 미키 마우스가 찍혀있다. 인상적이다. 이 집을 어디에 쓸까 생각하다 옥상에 올라가 물탱크 위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본다. 진짜 빈집 위에 가짜 빈집을 올려놓고 찍는 셈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의 기호인 장난감 집을 역시 쓸모없는 기호가 된 집 위에 놓고, 이미지에 불과한 사진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건 놀이다. 그냥 빈집들이 늘어선 마을을 돌며 찍는 것보다 이게 더 재미있다.
여기저기 집을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미키네 집이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누군가 이 비슷한 작업을 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뭔 상관이랴. 아예 미키네 집을 담아 들고 다닐 비닐봉지를 찾다가 쇼핑백을 하나 발견한다. 딱 맞는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러나 바람을 예상 못했다. 지붕 위에 올려놓고 찍다가 바람 때문에 연립주택 사층에서 미키네 집이 떨어진다. 다행히 주워 올릴 수 있는 곳인데 집이 부서졌다. 아쉬운 대로 버리고 간 스카치테이프를 주워 집을 수리한다. 겨울에 주운 집을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지붕 위, 방 안, 나무 위, 길, 계단… 집을 올릴 수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올려놓고 찍는다. 연립 주택 옥상에 미키네 집을 올리고 흘러가는 구름이 그 위에 멈출 때를 기다려서 찍는다. 언젠가 동화 속에서 본 듯한 풍경이 된다. 아니 본 적이 없다. 단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할 뿐.
그 사이 포크 레인이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한 채씩 집이 사라지고 어느 날 현장사무실과 함바 식당이 들어선다. 현장 사무실 앞에는 새로 들어설 아파트 조감도가 붙는다. 일요일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이 찾아와 자기네가 들어가 살 아파트의 위치를 가늠하며 가족 나들이를 한다.
돌아다니는 범위를 넓혀본다. 진관외동이다. 그곳 역시 은평지구 신도시 개발 때문에 헐릴 곳이다. 집집마다 철거할 대상임을, 보상이 끝났음을 알리는 페인트 글씨가 함부로 쓰여 있다. ‘빠른 이사가 최선’. 돌아다니다 만난 주민들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이들 가운데 입주권을 받더라도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십 퍼센트도 안될지 모른다고 지나가는 등산객과, 빈집을 돌아다니며 쓸만한 물건을 모으던 아저씨가 말한다. 그 아저씨는 덧 붙여 자기가 뉴욕에 한 십 년 있었는데 거기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포클레인을 차로 싣고 와 조립해서 쓴다며, 이 따위로 재개발을 해서는 안된다고 투덜댄다. 어쨌든 지금 내가 거기 산다면 입주권을 받아도 소용이 없다. 임대 아파트가 아닌 한. 그러니까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아니 역시 아직 남의 일이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게지.
역시 사진은 구경의 일종이다. 뭐라고 떠들어도 시각적인 것이 먼저다. 그 구경거리를 찾아서 걷고 걷다 결국 북한산에 오른다. 수리봉 꼭대기에 앉아 서울을 본다.
서울 근교 그린벨트 지역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이십 대의 누군가는 서울은 거대한 공갈빵 같은 도시라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공감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지도, 자라지도 않았지만 서울은 공갈빵이다.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 공갈빵. 그러고 보니 짐 캐리가 나왔던 어떤 헐리우드 영화가 생각난다. 거대한 스튜디오 안에서 평생 텔레비전 중계용 삶을 살다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를 건너 진짜 세계를 찾아가는. 그러나 그 이후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 아무리 몸부림 쳐봐야 하나의 공갈빵 안에서 다른 공갈빵으로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리라는 것을.
현실은 양파 껍질 같은 여러 겹의 공갈빵으로 되어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이라는 공갈빵이 지겨워서 서울 밖으로 나가봐야 작은 규모의 서울, 혹은 서울을 꿈꾸거나 서울의 일부를 잘못 옮겨놓은 것 같은 공갈빵을 만날 뿐이다
서울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다. 그 안에 무수히 많은 도시들이 존재하는 복잡한 다층적 구조, 앞서 말했던 겹 공갈빵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메트로, 혹은 메가로 폴리스와도 다르다. 도심, 부도심, 변두리 따위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서울을 지리적 지도가 아니라 인식적 지도, 혹은 심리적, 정치 경제적, 문화적 지도로 따로 그려보면 그것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경제적 지도에서 그 크기가 확대될 강남은 문화적 지도에서는 어떨까? 강북구나 양천구의 경제적 면적은 얼마나 될까? 어디서, 어떻게 거주하고, 계급적 지위와 경제적 소득 따위에 따라 서울은 전혀 다른 도시가 된다. 누군가는 지리적으로는 서울에 있지만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변방에 있고, 또 누군가는 그 반대가 된다. 적어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수만큼의 서울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서울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서울은 그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서울의 모든 것들은 이 장소의 표절 (place plagiarism)이다. 물론 이러한 표절은 서울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도시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특히 서울의 경우 그 표절은 과정 자체가 지독하게 왜곡되어 있다. 거의 모든 것이 뒤틀린 서울은 일종의 배타적인 중독된 장소감(poisond placeness)을 낳는다.
중독된 장소감이란 장소가 가지는 긍정적 역할인 합리적인 균형이 깨질 때 다른 장소와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을 뜻 한다. 즉 특정한 장소와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월성을 공유하며, 다른 장소와 거주민에 대한 공포를 부풀리며 결국 배타성을 띠게 된다. 그것이 국가적인 단위로 나타난 경우가 나치 독일이다. 나치 독일은 국가적 경관, 문화에 대한 강박적 사랑으로 인해 자기 나라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나라를 정화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서울 강남은 바로 이러한 중독된 장소감을 갖고 있는 지역의 하나이다. 그 중독성은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 자란 사람들이 서울의 강북과 여타 지역에 대해 공포감, 혹은 선민의식을 갖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른바 폐쇄적인 장소 형성(place cocoons)을 하게 된다. 폐쇄적 장소 형성은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자신들이 식민지에서 받아들이기 싫은 여러 조건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제 시대 서울에 형성되었던 충무로, 남산 일대의 일본인 촌 따위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강남 역시 갈수록 그 경제, 권력의 독점적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폐쇄적인 장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폐쇄적 장소로서의 강남은 서울의 다른 지역과 대한민국 전체를 식민지로 삼는 일종의 내부 식민 지배 지역이 된다. 또한 그곳은 뉴욕이나 파리, 런던의 식민지 노릇을 한다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폐쇄적 장소, 중독된 장소감이 역으로 강남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낳고 범죄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근래에 있었던 강남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 납치 사건 따위가 그것이다. 이 공격성은 서울,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장소에서 생산된 권력과 경제적인 박탈감과 무력감에서 비롯된다. 아주 과장해서 말하면 강남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원주민의 범죄적 저항 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서울이라는 공간이 합리적인 균형을 이룬 동질적 공간이 아니라 서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간들이 집합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장소들의 무차별적 집합인 서울은 시각적으로도 끔찍한 경관을 형성한다. 지금 내가 있는 수리봉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서울의 입지, 경관이 대단히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시를 둘러싼 산과 강을 찢고 갈라놓은 길과 건물들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다음 바라보면 서울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과거의 것, 혹은 완전한 공상적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좀 뻥을 치자면 서울은 갈수록 소르킨(Michael Sorkin)이 말하는 시간과 공간이 쇠퇴해버리고 장소성이 없는 도시인 반지리학적 도시(ageographical city)가 되어간다.
날이 어둑해진다. 평소에 다니지 않는 길로 수리봉을 내려온다. 빈집들이 있는 그 동네로. 아직 이사 가지 않은 집들에 불이 켜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집은 어떤 것일까? 붉은 지붕과 노란 벽를 가진 서양식 미키네 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가옥의 형태일까.
그것이 이상적 가옥이건 아니건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시켜보면 아이들은 분명히 아파트에 사는 데도 지붕과 창문과 굴뚝을 가진 집을 그린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아파트는 집이 아닌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 말처럼 일종의 거주 기계일 뿐. 어른들은 어떨까. 아마도 어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파트를 선택한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 가옥은 아파트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알아도 소용없다. 사실 집이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집이 아니라 그냥 자기 집이 필요하고, 한 채 이상의 집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살 집이 아니라 집값이 오르는 것이 보장된 투기가 필요한 것일 테니까.
수련자 혹은 태산압정
미키네 집을 대강 찍고 나서 뭐 또 그럴만한 물건이 없을까 찾는다. 원래는 버리고 간 물건들을 정물처럼 잘 진열해 놓고 한 컷 씩 찍을 생각이었는데 뭔가 탐탁지가 않다. 이곳저곳에서 봉제 인형을 살펴본다. 인형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다. 동물, 사람이 거의 전부다. 가끔 곤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동물의 일종일 뿐이다. 대신에 캐릭터는 다양하다. 푸우 나 스누피 같이 잘 알려진 것에서부터 난생처음 보는 얼굴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는 거의 중고 봉제 인형 장사를 해도 될 만큼 많은데 모조리 버리고 갔다. 아이가 갖고 놀 필요 없을 만큼 컸거나 인형의 생명력이 짧다는 얘기일 것이다.
인형들 중 특이한 인형을 발견한다.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웃통을 벗어 제친 게 격투기 선수 모습이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게임 캐릭터일 것 같다. 미키네 집과 마찬 가지 방법으로 그 인형을 여기저기 놓고 사진을 찍는다. 땅 속에 몸을 묻고, 전신주에 달라붙고, 지붕 위에 올라가고, 전선에 매달린다. 배경으로는 철거될 집들이 들어간다. 일종의 꼼수를 쓰는 것이다.
사진을 웬만큼 만들고 나자 정체가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캐릭터일까. 격투기 게임 캐릭터인 건 알겠는데 심 시티 이래 게임과는 담을 쌓고 사는 처지라 인터넷을 뒤진다. 얼마 뒤지지 않아 금방 밝혀진다. 카주야 미시마, kazuya mishima, 남코라는 일본 게임회사가 95년에 발매한 테이켄(鐵拳)이라는 게임의 등장인물이다. 95년 산이니 나이가 꽤 든 캐릭터이다.
게임도 진화해서 다섯 번째 버전이 출시되었고, 외양과 내용도 달라졌다. 물론 이 게임을 해본 적은 없다. 카주야의 주특기는 일본 공수도니 내가 작품 제목으로 붙인 중국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초식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러나 뭐 어떠랴. 어차피 가짜인 것을.
작품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다시 인터넷을 뒤져 중국 무협의 초식 이름을 찾는다. 몇몇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태산압정(泰山壓丁), 횡소천군(橫掃千軍), 장홍관일(長虹貫日), 만천화우(滿天花雨)…. 등등의 초식 이름과 기타 등등. 오래전 무협 소실을 열심히 읽던 시절의 기억이다. 거의 넉자의 한자로 이루어진 이름들은 시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태산압정은 간단히 위에서 아래로 상대의 머리를 내려치는 초식이고, 횡소천군은 가로 휘두르는 초식이고, 만천화우는 암기를 잔뜩 뿌리는 것인데 한자로 써놓으면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인터넷 무협 전문 사이트에는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구방일파와 세가, 기이한 종교들에 대한 해설과 온갖 무공들이 잘 분류되어 있다. 마치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무협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중학교 이 학년 시절 친구에게서 빌어본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와룡생이 쓴 ‘비룡’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원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이름 몇이 떠오른다. 주약란이란 이름의 비운의 명나라 공주, 남자 주인공은 곤륜파의 양씨성이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에 악역을 맡은 도옥이란 이름은 금환이랑이라는 별호까지 생각난다. 아 다시 기억났다. 남자 주인공은 양몽환이었다. 맞나? 아무래도 좋다. 지금 다시 읽으라면 도저히 다시 읽을 수 없을 것 같지만 흠씬 빠져서 읽었었다. 그 뒤로 학교 도서관에 있는 무협소설을 읽기 시작해서 대여점들을 훑고 새 소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소설 제목들이 뭐였더라. 비호, 금검지… 이런 전혀 생각이 안 난다.
다시 무협지를 본건 거의 삼십 년이 지나 김용의 소설이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 뒤였다. 그것도 꼭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처음 책을 쓸 때 진도가 너무 안 나가서 뭔가 도망갈 곳이 필요해서였다. 김용의 소설이 그중 나았다. 내친김에 추리적인 요소가 가미된 고룡도 읽었다. 그 뒤로 쏟아져 나온 국내 작가 몇을 읽었는데 좌백 정도가 기억난다.
무협지는 판타지다. 그 판타지는 당연히 비현실적이고 과장되어 있다. 서양의 마술과 마법이 판타지이듯이 무협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그 무협지 속에 등장하는 무술초식, 내공 수련 방법의 일부는 실재한다. 앞서 말한 몇몇 초식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식, 무협 계보, 구방일파, 세가 등등은 가짜다. 그 가짜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 세계는 인터넷 무협 사이트이기도 하고 게임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 게임의 세계의 일부가 인형으로 현실화된 것이 바로 수련자에 등장하는 가즈야이다. 그러므로 가즈야는 현실의 일부가 되었다. 사실일까? 생각해보면 가즈야라는 인형은 등장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으로 현실이 된다.
물론 초기 무협의 세계는 중화적 세계관, 변방 민족들에 대한 경멸과 경계, 권선징악적 이데올로기, 불교와 도교이외의 종교에 대한 편견 등등이 이념적 배경을 이룬다. 주인공들은 빼어난 용모와 탁월한 능력을 가졌고 예외 없이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적 세계관을 열심히 실천한다. 그러니까 무협지는 중화적 남성 판타지인데 뭐 그만하자. 내가 지금 무협지에 대한 비평을 쓰려는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수련자의 가즈야는 가짜고 가짜니까 현실에 등장시켰다. 그는 담에 꽂힌 유리병에 몸을 비비며 금강불괴가 되고, 전깃줄을 타고 능공허보를 실천하고, 벽에 달라붙어 벽호공을 시전 한다. 이 연출이 무너지고 새로 지어지는 서울 외곽의 집들과 원주민들에 관해 뭔가 말하고 있을까.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비난받을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뭔가 비틀고 싶었다. 이 비틀림도 어쩌면 도망의 일종일 것이다. 능공허보(凌空虛步)나 초상비(草上飛) 수법으로 도망가며 현실 세계에 대한 적엽비상(摘葉飛傷)- 잎사귀 따 뿌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고등 무술- 수법을 실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따위 사진에 상처 받는 사람은 없겠지만.
수련자에 등장하는 가즈야 인형이나, 미키네 집의 장난감 집은 영화 용어를 빌자면 일종의 멕거핀이다. 멕거핀이란 잘 알다시피 스릴러 장르 영화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소도구들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자주 보여줘 관객을 속이는 장치이다. 물론 이 장치는 소도구가 아니라 인물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런 장치로서 가즈야는 효과를 발휘했을까? 물론 사진은 영화가 아니다. 서술적인 능력이 없다. 그래서 한 장면에 서술적인 요소와 시각적 은유, 멕거핀 장치 그 너머의 무엇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진이 어려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시각적인 장면 하나로 모든 것을 압축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압축은 반드시 사진 찍는 사람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우연들,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가즈야는 그 장애물들을 뚫고 얼마나 갔을까? 내가 가즈야를 들고 돌아다녔던 곳은 사람이 살았던 집과 그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시각적으로 힘이 세다. 그 힘과 멕거핀으로서의 가즈야 사이의 긴장 사이를 태산압정 한 수로 내려쳤을지 의문이다. 가즈야가 그렇듯이 나도 여전히 수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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