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geonhi.com/korean/전성영-칼과-철-2009-2010/
칼과 철 1.사철채취 제사(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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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영
칼과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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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철
2009-2010
http://geonhi.com/korean/전성영-시간의-지문-1999-2010/
시간의 지문 1.서고성(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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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영
시간의 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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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은 고구려 영류왕의 지시로 연개소문이 총책임자가 되어 축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수나라와의 전쟁 때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어서 그들의 침약을 막아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br>\n<br>\n2002년 10월 말부터 약 20일간의 일정으로 중국 요령성 무순에서 대련까지 천리장성의 주요 거점성들을 조사하면서 사진으로 기록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중에서 고이성,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의 동쪽 지역과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의 피난성이었던 환도산성은 중국인들이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곳으로, 만약 그 지역에 들어갔다가 발각이 되면 큰 고초를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큰 문제로 다가왔다. 몸으로 겪어야 할 고초는 감당한다 하더라도 만약 발각이 된다면 촬영한 모든 사진들과 카메라들을 압수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다. 촬영 기간 중간에 서너 번 쯤 큰 도시로 나가서 우편이나 DHL로 촬영한 필름들을 한국으로 보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선택한 방법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었다. 데이터화 된 사진들이 필름 매거진보다는 그들의 눈을 피하기가 쉬울 것이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2002년부터 600만 화소가 넘는 DSLR들이 출시가 되었고 나름대로 테스트해 본 결과 135 슬라이드 필름과 비교해 부족하지 않은 화질이 구현되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br>\n<br>\n고구려 천리장성 사진기록작업은 고달팠지만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갔다. 위험한 곳으로 서 긴장했던 안시성, 건안성, 비사성 등을 감시망을 잘 피해서 성공적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촬영 14일째 되는 날 마지막 고비였던 환도산성에서 결국 공안원에게 체포되어 집안 파출소와 공안국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이틀간 조사를 받은 후 가지고 있던 돈 모두를 벌금으로 빼앗겼고 두 세트의 카메라 장비 중 한 세트를 압수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동안 촬영했던 사진들은 단 한 컷도 그들에게 내주지 않았다. 미리 준비했던 미 노광된 슬라이드매거진 6개만 그들에게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지켜야 했기에 저항 없이 카메라와 돈을 넘겨주고서 탈출하듯 빠져나왔다. 그 사건 이후 2년 뒤에 동북공정이 터지게 되었고 그때 내가 촬영했던 사진들을 글과 함께 모아서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라는 제목으로 한길사에서 출판을 하게 되었다.<br>\n<br>\n나의 고대사탐험은 만주지역의 부여, 고구려에서 한강유역의 백제 그리고 바다건너 일본 열도로 연장되게 된다. 그것은 일본 열도의 고대국가의 형성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의 특징을 가진 집단에 의해서 라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 처음 일본으로 건너가 열흘간의 일정으로 일본 고대 문명의 중심지인 오사카, 나라, 교토 일대를 돌아보았다. 일본의 고대 문명을 돌아보고 온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일본 열도에서 출토된 수많은 고대 유물들, 특히 기마민족의 유물인 마구(馬具)와 철갑옷, 투구, 환두대도 등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일본 열도의 고대 문명의 기원이 한반도라고 생각해도 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그 후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을 돌아보고 나서 깨끗이 정리가 되었다. 가야연맹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본 후 일본 열도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더 훌륭한 문명이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음을 유물들로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br>\n<br>\n‘에가미나미오’라는 세계적인 일본의 고고학자는 ‘기마민족 도래설’이라는 학설을 만들어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 열도의 고대 문명은 중국 북방의 기마민족이 내려와서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하다가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지배층을 형성하고 고대 문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한반도는 그들의 경유지였을 뿐이고 그들이 정착하고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은 일본 열도라는 주장이다. 이런 에가미나미오가 1990년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 발굴 현장을 방문해서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어떤 유물을 보고는 한편으로는 기쁨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기뻤던 이유는 그가 학자였기 때문이었고, 착잡한 이유는 일본인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를 기쁘게 그리고 착잡하게 만든 유물은 ‘파형동기’라는 유물인데 그것은 그때까지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던 유물이었다. 바람개비 형상을 한 이 유물은 일종의 장식품으로서 방패에 부착하였던 장식물이었다. 그런 유물이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6점이 출토가 되었는데 일본의 파형동기와 비교해서 시기도 앞서고 크기도 훨씬 큰 것들이었다. 이런 파형동기가 금관가야지역이었던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출토됨으로써 파형동기가 일본 고유의 유물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이 유물의 존재로 인해 고대 일본 지배층이 가야에서 건너간 계층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매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대 유적들을 찾아 조사하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일본의 신화 역시 고조선과 진한, 변한 그리고 백제인들이 일본 열도로 진출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쉽게 풀어내기에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2005년부터 시작한 일본 열도의 역사탐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 중이다.<br>\n<br>\n역사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하면서 초기에 나는 나의 주관적인 감정을 많이 담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촬영하여 많은 정보가 담긴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이렇게 작업을 진행하면서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유적이나 유구들은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런 감동들은 아마 ‘과거와의 교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천 수백 년정도는 극복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이런 감동들이 나를 역사탐험으로 계속 이끌고 있으며, 아마도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은 이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n"}, :artist=>{:title=>"전성영, Jeon Sungyoung", :description=>"[학력]<br>\n1990 신구대 사진과 졸업<br>\n<br>\n[개인전]<br>\n2010 시간의 지문, 대안공간건희, 서울<br>\n<br>\n[그룹전]<br>\n2000 제1회 한국출판사진가협회 사진전, 코닥포토살롱, 서울<br>\n2001 제2회 한국출판사진가협회 사진전, 후지포토살롱, 서울<br>\n<br>\n[출판]<br>\n2004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 한길사<br>\n2008 100 COLTURAL SYMOGLS OF KOREA(공저), Discovery media<br>\n2009 Temples of Korea(공저), Discovery media<br>\n<br>\n[경력]<br>\n2002 한국출판사진가협회 제3대 회장\n"}}
시간의 지문
1999-2010
전성영
[학력]
1990 신구대 사진과 졸업
[개인전]
2010 시간의 지문, 대안공간건희, 서울
[그룹전]
2000 제1회 한국출판사진가협회 사진전, 코닥포토살롱, 서울
2001 제2회 한국출판사진가협회 사진전, 후지포토살롱, 서울
[출판]
2004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 한길사
2008 100 COLTURAL SYMOGLS OF KOREA(공저), Discovery media
2009 Temples of Korea(공저), Discovery media
[경력]
2002 한국출판사진가협회 제3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