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geonhi.com/korean/이동근-아리랑-예술단-두만강-2018/
아리랑예술단 C 2018 - 도문 - 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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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아리랑 예술단 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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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양으로 북한 노래를 부르고 전문 무용수들은 북한의 춤을 춘다. 이따금 한국 가요를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관객들에게 북한에 대한 향수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통일에 대한 낭만적인 감정을 만든다.<br>\n<br>\n하지만 이들이 무대를 내려서면 현실의 삶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의 경험이 없기에 경제적 활동도 어렵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다. 더러 성공한 탈북민들이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생활이 힘들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기초수급대상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드물게는 한국에서의 삶에 실패한 탈북민이 북한으로 재입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br>\n통일에 대한 기대감 역시 두꺼운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작년에는 남.북의 정상이 함께 백두산을 오르며, 분단 70년 만에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통일에 대한 논의는 더는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계속하여 북한은 자주권을 내세우며 핵을 준비하고, 미국은 북한의 의지를 꺾기 위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주변의 강대국들 역시 자국의 이익과 실리를 챙기기 위하여 분주하다. 정치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족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 이곳 한반도임을 알 수 있다. 언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기도 하다.<br>\n그들은 이 부조리한 구조에서 발생한 난민들이다.<br>\n1990년대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북한의 기근과 폭정으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의 숫자는 약 33,000명을 넘었다. 그들 중에서 북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대략 70~80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br>\n<br>\n‘아리랑예술단’은 결혼이주여성에 관한 작업 ‘초청장’ 이후 디아스포라의 연작으로 촬영되었다. 이전의 작업이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의해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결혼이주여성을 통해 외부로부터 편입된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면, 아리랑예술단은 이념과 정치, 그리고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민족 내부에서 발생한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라고 하는 테두리에 편입되지 못한 채 경계에선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두 가지 모두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이주, 난민에 관한 작업이다. 우리는 범주화하는데 유능하다. 가족, 동문, 동향, 동년배, 지역, 민족 등 우리라고 하는 틀로 동질화하고 또 타자화 한다. 탈북민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지만(대한민국 헌법에는 한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다,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범위를 해석하는데, 북한 주민 역시 대한민국의 영토에 살았기에 국민으로 판단한다.) 여전히 이방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br>\n70년이라는 분단의 시간은 한반도 땅뿐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길고 깊게 분단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분단의 고통은 고스란히 개인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 후 좌, 우익의 대립, 신탁통치, 분단과 한국전쟁, 냉전 체제로 이어져 온 이념의 갈등과 상처를 메우기 위해서는 어쩌면 지나온 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식민과 분단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근대사는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br>\n<br>\n이 작업은 영상과 함께 함께 두 가지의 세부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아리랑예술단의 공연 모습과 무대 뒷모습의 기록이다. 단원들의 구성은 절반 정도가 북한의 소년궁전이나 예술선전대에서 전문적인 활동과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단원들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일정과 조건이 맞으면 전국 어디든지 공연하러 가는데, 봄, 가을에는 멀리 지방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공연에 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가 관객들의 태도다. 행사의 내용에 따라 관객들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통일에 관련된 행사보다도 시골의 작은 축제에서 반응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 곳일수록 연민과 호기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관객들과의 친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br>\n‘무대에 올랐을 때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br>\n두 번째 프로젝트로는 두만강 변의 풍경 작업이다. 대다수의 탈북민이 넘어오는 곳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압록강 상류 지역과 두만강 유역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두만강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양강도에서는 압록강으로, 함경도에서는 두만강을 건너 탈출하게 된다. 1990년 중반부터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굶주림에 지친 많은 사람이 강을 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이유에 의해 본격적인 북한이탈주민들이 생겨나는데, 강을 넘는 것에는 많은 대가가 필요하였다. 더러 강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었고, 강을 넘더라도 인신매매와 같은 폭력에 노출되었다. 강을 무사히 넘더라도 중국 내에서 공안에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두만강은 탈북민들에게 희망의 강이자 슬픔의 강이기도 하다.<br>\n‘두만강에서 분단의 아픔을 본다.’<br>\n<br>\n얼마 전 예린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빛바랜 평양 개선문 사진을 배경으로 부모님과 동생들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북한을 탈출 한 뒤에 찍은 사진이라 예린의 모습은 없다. 그 사진 속에 자신의 모습을 넣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br>\n‘이제 사진 속의 가족은 만날 수 없고,<br>\n사진 속에서라도 가족들과 함께 있으려 한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E2%80%98%EC%82%B6-%EB%B9%84%EC%8A%B7%ED%95%9C-%EA%B2%83%E2%80%99%EC%9D%84-%EC%82%B4%EC%95%84%EA%B0%80%EA%B8%B0%EC%9E%84%EC%A7%80%ED%98%84.pdf\">[임지현]</a><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EC%95%84%EB%A6%AC%EB%9E%91%EC%98%88%EC%88%A0%EB%8B%A8%EA%B9%80%EC%86%8C%EB%9D%BC.pdf\">[김소라 미술비평가]</a>\n"},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http://geonhi.com/korean/이동근-아리랑-예술단-2014-2018/
아리랑예술단 2015 - 철마 - 6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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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아리랑 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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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단체다. 살기가 힘들어 북한을 탈출했지만,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또다시 북한 노래와 춤을 춰야 한다. 주로 지방의 축제 무대나 통일 관련 행사에 초청을 받아 공연한다. 행사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러퍼토리와 가수, 무용수, 공연 시간 등 전체의 공연 계획이 결정되고 리허설을 거쳐 무대에 오른다. 가수들은 특유의 억양으로 북한 노래를 부르고 전문 무용수들은 북한의 춤을 춘다. 이따금 한국 가요를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관객들에게 북한에 대한 향수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통일에 대한 낭만적인 감정을 만든다.<br>\n<br>\n하지만 이들이 무대를 내려서면 현실의 삶도,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의 경험이 없기에 경제적 활동도 어렵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다. 더러 성공한 탈북민들이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생활이 힘들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기초수급대상자들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드물게는 한국에서의 삶에 실패한 탈북민이 북한으로 재입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br>\n통일에 대한 기대감 역시 두꺼운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작년에는 남.북의 정상이 함께 백두산을 오르며, 분단 70년 만에 처음으로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희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통일에 대한 논의는 더는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계속하여 북한은 자주권을 내세우며 핵을 준비하고, 미국은 북한의 의지를 꺾기 위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주변의 강대국들 역시 자국의 이익과 실리를 챙기기 위하여 분주하다. 정치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민족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 이곳 한반도임을 알 수 있다. 언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험이 상존하는 곳이기도 하다.<br>\n그들은 이 부조리한 구조에서 발생한 난민들이다.<br>\n1990년대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북한의 기근과 폭정으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의 숫자는 약 33,000명을 넘었다. 그들 중에서 북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대략 70~80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br>\n<br>\n‘아리랑예술단’은 결혼이주여성에 관한 작업 ‘초청장’ 이후 디아스포라의 연작으로 촬영되었다. 이전의 작업이 자본주의 시장 질서에 의해 발생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결혼이주여성을 통해 외부로부터 편입된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추적하는 작업이었다면, 아리랑예술단은 이념과 정치, 그리고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민족 내부에서 발생한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라고 하는 테두리에 편입되지 못한 채 경계에선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두 가지 모두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이주, 난민에 관한 작업이다. 우리는 범주화하는데 유능하다. 가족, 동문, 동향, 동년배, 지역, 민족 등 우리라고 하는 틀로 동질화하고 또 타자화 한다. 탈북민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지만(대한민국 헌법에는 한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다,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범위를 해석하는데, 북한 주민 역시 대한민국의 영토에 살았기에 국민으로 판단한다.) 여전히 이방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br>\n70년이라는 분단의 시간은 한반도 땅뿐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길고 깊게 분단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분단의 고통은 고스란히 개인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 후 좌, 우익의 대립, 신탁통치, 분단과 한국전쟁, 냉전 체제로 이어져 온 이념의 갈등과 상처를 메우기 위해서는 어쩌면 지나온 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식민과 분단으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근대사는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br>\n<br>\n이 작업은 영상과 함께 함께 두 가지의 세부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아리랑예술단의 공연 모습과 무대 뒷모습의 기록이다. 단원들의 구성은 절반 정도가 북한의 소년궁전이나 예술선전대에서 전문적인 활동과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단원들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일정과 조건이 맞으면 전국 어디든지 공연하러 가는데, 봄, 가을에는 멀리 지방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공연에 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것 중의 하나가 관객들의 태도다. 행사의 내용에 따라 관객들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통일에 관련된 행사보다도 시골의 작은 축제에서 반응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 곳일수록 연민과 호기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관객들과의 친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br>\n‘무대에 올랐을 때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br>\n두 번째 프로젝트로는 두만강 변의 풍경 작업이다. 대다수의 탈북민이 넘어오는 곳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인 압록강 상류 지역과 두만강 유역이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두만강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양강도에서는 압록강으로, 함경도에서는 두만강을 건너 탈출하게 된다. 1990년 중반부터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굶주림에 지친 많은 사람이 강을 넘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다양한 이유에 의해 본격적인 북한이탈주민들이 생겨나는데, 강을 넘는 것에는 많은 대가가 필요하였다. 더러 강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있었고, 강을 넘더라도 인신매매와 같은 폭력에 노출되었다. 강을 무사히 넘더라도 중국 내에서 공안에 붙잡혀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두만강은 탈북민들에게 희망의 강이자 슬픔의 강이기도 하다.<br>\n‘두만강에서 분단의 아픔을 본다.’<br>\n<br>\n얼마 전 예린으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빛바랜 평양 개선문 사진을 배경으로 부모님과 동생들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다. 북한을 탈출 한 뒤에 찍은 사진이라 예린의 모습은 없다. 그 사진 속에 자신의 모습을 넣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br>\n‘이제 사진 속의 가족은 만날 수 없고,<br>\n사진 속에서라도 가족들과 함께 있으려 한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E2%80%98%EC%82%B6-%EB%B9%84%EC%8A%B7%ED%95%9C-%EA%B2%83%E2%80%99%EC%9D%84-%EC%82%B4%EC%95%84%EA%B0%80%EA%B8%B0%EC%9E%84%EC%A7%80%ED%98%84.pdf\">[임지현]</a><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EC%95%84%EB%A6%AC%EB%9E%91%EC%98%88%EC%88%A0%EB%8B%A8%EA%B9%80%EC%86%8C%EB%9D%BC.pdf\">[김소라 미술비평가]</a>\n"},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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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아파트, 20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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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모던시티 좌천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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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사진 강좌를 하고, 주민들이 자신의 삶과 시선을 직접 사진으로 찍어 전시까지 하는 프로그램이다. 원도심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지역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의 의미를 찾는 것이 목적이다.<br>\n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외벽, 어두컴컴한 복도, 계단 입구에 누군가가 갖다 놓은 낡은 나무의자, 아파트 옹벽 사이에 걸린 빨래. 다시 찾은 좌천아파트는 놀랍게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30여 년 전 인근의 학교를 다니면서 익숙하게 봤었던 모습들이다.<br>\n공간이 더디게 변하다 보니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삶의 도구도 과거의 시간을 품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삶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생경한 모습이다. 경험하지 못해 낯선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낯 섬이다. 불시에 다가온 낯 섬은 곧 기원에 대한 기억의 회로를 작동시킨다. 검붉은 고무 물통, 파란 슬리퍼, 창문 틈의 장독, 나무 선반에 올려진 양은냄비.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이다. 손때가 묻어있는 가재며 도구들은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여과 없이 전해준다. 사진이 공간과 시간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손때가 묻어있는 가재며 도구들은 경험과 기억의 집합체이다. 사람의 기억은 홀로 서는 완벽하지 않다. 선명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각색되고 탈색되어 종국에는 잊히기도 하지만, 경험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물의 도움으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물의 기억은 나의 기억과 동등하다. 사진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기억을 환기시키듯이 내가 바라보는 좌천아파트의 부엌과 방, 그리고 복도는 나의 또 다른 기억을 촉발시킨다.<br>\n그곳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또 렌즈로 바라보았다.<br>\n그리고 사진으로 담았다.<br>\n공간과 사물의 단순한 외형보다는 일상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기억들을 담으려 하였다.<br>\n촬영하는 순간,<br>\n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나의 유년 시절로 돌아갔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EB%8B%A4%EC%8B%9C-%EC%9E%83%EC%96%B4%EB%B2%84%EB%A6%B0-%EC%8B%9C%EA%B0%84%EC%9D%84-%EC%B0%BE%EC%95%84%EC%84%9C%EA%B9%80%EC%86%8C%ED%9D%AC.pdf\">[김소희]</a><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ED%94%84%EB%A0%88%EC%9E%84-%EB%84%88%EB%A8%B8%EC%97%90%EC%84%9C-%EB%A7%90%ED%95%98%EA%B8%B0.pdf\">[박훈하]</a>\n"},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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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장고향, 도티화, 베트남,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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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초청장 고향_도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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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름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남편과는 1년2개월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br>\n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잠도 못자고 밥도 잘 먹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나 혼자 두고 떠났습니다.<br>\n베트남으로 돌아가려 생각도 했지만 한국에 정이 들어 한국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식당에서 일 시작 했습니다. 혼자 한국에 살려면 돈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br>\n조금이라도 고향 부모님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베트남에 그냥 돌아가면 부모님이 더 걱정하시니까.<br>\n한국에 살려고하면 남편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마침 그때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외국인등록 기간만료가 다 돼서요. 저와 남자친구는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베트남에 돌아가 결혼신고 하려니 서류가 너무 복잡합니다. 전남편과의 혼인기록이 있으니 서류가 너무 복잡합니다.<br>\n돌아가신 남편에게 정말로 미안하지만, 다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br>\n왜냐하면 저는 한국에 계속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br>\n제 마음에 알아주면 좋겠습니다.<br>\n저와 한국에 살고 있는 이주여성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br>\n<br> <br>\n2012.10<br>\n도 티화<br>\n<br>\nartist statement<br>\n단일민족, 백의민족의 동질성에 자긍심을 갖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이주가 보편화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형성될수록 우리의 의식은 완고하리만큼 배타적 경계를 유지한다. 뿌리 깊은 ‘민족주의’ 때문이다.<br>\n우연히 ‘외국인 주부 한글 교실’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인 주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유도하는 다문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외국인 주부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이었다. 우리와 다른 외모, 어눌한 발음은 타 문화권 출신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고,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br>\n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쉽사리 동화되지 못한 그녀들은 자신의 특수한 삶의 방식을 존중받지 못한 채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소수자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녀들의 정체성을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이른 지점이다.<br>\n급속한 경제 발전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비싼 임금은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남아선호 사상에 의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여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간호사 파견, 기지촌 여성 문제, 아메리칸드림 등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br>\n<br>\n이 작업의 큰 틀은 우리 사회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국가, 민족 등을 포괄하는 다문화주의지만, 세부적인 작업의 의도는 우리 사회와 아시아에 속한 제3세계권 여성의 ‘결혼’ ‘이주’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정체성’이다.<br>\n인간은 관습화 되고 사회화된 결혼 제도를 통해 생리 본능, 즉 자신의 유전자를 영속시킨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생리적 욕망뿐 아니라 ‘심리적 이끌림-사랑’이라는 감정 변화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들은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드물다. 10~20분의 짧은 대면으로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평생 자신의 삶을 의지할 남편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혼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의 유형을 만들고 있다.<br>\n‘다문화 가족’은 우리 사회 급격한 변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정부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사고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이 된 세계화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여전히 진부한 관념에 갇혀 있다. 이주민들을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고 다문화 정책 역시 그들을 소외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통한 경제력 상승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결혼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근본 이유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들은 빈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초청장 한 장에 의지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br>\n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만들어 낸 ‘순혈주의’에 익숙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운명으로 엮인 순수한 혈연 공동체라는 의식은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혼이주민에게는 국적이 다른 두 가족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족, 그 가족을 구원할 부유한 한국의 가족.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모 형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우리가 되기 위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br>\n<br>\n촬영 대상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카메라 앞에 세우는 문제였다. 흔쾌히 촬영에 응하는 분도 있었지만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과 결혼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한다든지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촬영은 전적으로 남편이 결정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거니와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결혼 초기의 이주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대리되고 중계되는 삶을 산다고 할 정도로 주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주도권은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걸러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의 권력이 더해져 이중의 고통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br>\n그 단적인 예는 국적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에서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내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다. 우선 결혼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막상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국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떠나갈까 봐 남편이 아내의 국적 취득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br>\n촬영은 연출을 최소화함으로써 촬영 대상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는데,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 등에 유의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속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집에는 그들의 삶과 상이한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스며들어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입는 옷, 집을 꾸미는 방식, 소품의 종류와 배치에 유념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붙여 놓은 한글판이었다. 어린 자녀의 한글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결혼 이주 여성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언어의 문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엄마와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과 한글로 묶인 공동 운명체였다.<br>\n촬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녀들의 고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한국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그녀들의 근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한국 생활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과 국가를 얻었지만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에 선 그녀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그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린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서경식 작가]</a>"},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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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장고향, 레이옌, 베트남,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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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초청장 고향_레이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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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_url=>"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 :images=>["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1-819x1024.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2-678x1024.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8-1024x681.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15-1024x681.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20-1024x681.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21-1024x681.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22-819x1024.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9-1024x681.jpg", "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초청장고향-레이옌-베트남-201210-1024x68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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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_레이옌, 2012", :description=>"나는 베트남에서 온 레응억이다. 우리 집은 호치민에서 100km 쯤 떨어진 시골에 있다.<br>\n 3남매 중 장녀로 두 명의 남동생과 부모님, 이렇게 다섯 식구는 행복하게 살았고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컸다. 나와 남동생은 나이차가 많이 난다. 바로 밑 남동생이 나보다 11살이 적고 막내 남동생은 15살이 적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한 반 40명의 학생 중 늘 1등 하였기에 모두가 나를 좋아했고 나는 행복했다. 유능한 소아과 의사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 치료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성적은 점차 떨어졌다. 그 당시 우리가족은 형편이 어려워서 부모님은 밖에서 돈을 벌어야했고, 자연스레 집안일과 동생들 돌봐주는 일은 나의 차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동사무소에 2년을 근무했다. 가난했기에 의사가 되고 싶었던 나의 꿈은 접었다. 공무원의 생활도 월급이 너무 적어서 어절 수 없이 그만두었다.<br>\n1998년에서 2000년 즈음 베트남에는 한국 드라마가 아주 인기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남자는 착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을 그만둔 후 관광 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때 한 한국 관광객 남자를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청혼을 받았다. 그때 나는 24살이었다. 이 남자의 나이는 많았었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부모님은 그와 의 결혼을 반대하셨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도 한국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집으로 자주 찾아왔고, 착해 보여서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결혼 서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남편이 나에게 속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게 말한 나이보다 실재의 나이가 훨씬 더 많았다. 남편에 대한 신뢰감을 잃어버린 탓에 슬픔에 빠졌다. 부모님은 “한국에 가면 행복할지 불행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파혼하고 베트남 남자와 결혼해라. 무슨 일이 생겨도 가족 옆에 있어야지”라고 권유를 많이 하셨다. 하지만 나의 고집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혼 서류를 완성하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br>\n 그러나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는 서운하고 슬펐다. 한국에 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왔기에, 가족과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어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국의 생활이 1년 정도 될 때까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신이 되고 베트남에서 아들을 낳았다. 출산 뒤 한국으로 오기 싫었지만 아들을 위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과 성격이 맞지 않아서 여러 번 이혼을 생각했지만, 아들 때문에 이혼할 수 없었다. 남편은 내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고 아들한데도 애정이 별로 없다. 현실과 드라마가 같이 않다는 것이 알게 되었다.<br>\n 한국에 산 지 9년 정도 되었지만 행복은 느끼지 못하고 기쁜 날보다 슬픈 날이 더 많다. 하지만 힘들 때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면서 힘을 낸다.<br>\n외국 여성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배우자와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에 대해서 나처럼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기를 바란다.<br>\n<br>\n레이옌<br>\n2012_12_12 LE NGOC YEN<br>\n<br>\nartist statement<br>\n단일민족, 백의민족의 동질성에 자긍심을 갖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이주가 보편화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형성될수록 우리의 의식은 완고하리만큼 배타적 경계를 유지한다. 뿌리 깊은 ‘민족주의’ 때문이다.<br>\n우연히 ‘외국인 주부 한글 교실’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인 주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유도하는 다문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외국인 주부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이었다. 우리와 다른 외모, 어눌한 발음은 타 문화권 출신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고,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br>\n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쉽사리 동화되지 못한 그녀들은 자신의 특수한 삶의 방식을 존중받지 못한 채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소수자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녀들의 정체성을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이른 지점이다.<br>\n급속한 경제 발전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비싼 임금은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남아선호 사상에 의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여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간호사 파견, 기지촌 여성 문제, 아메리칸드림 등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br>\n<br>\n이 작업의 큰 틀은 우리 사회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국가, 민족 등을 포괄하는 다문화주의지만, 세부적인 작업의 의도는 우리 사회와 아시아에 속한 제3세계권 여성의 ‘결혼’ ‘이주’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정체성’이다.<br>\n인간은 관습화 되고 사회화된 결혼 제도를 통해 생리 본능, 즉 자신의 유전자를 영속시킨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생리적 욕망뿐 아니라 ‘심리적 이끌림-사랑’이라는 감정 변화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들은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드물다. 10~20분의 짧은 대면으로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평생 자신의 삶을 의지할 남편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혼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의 유형을 만들고 있다.<br>\n‘다문화 가족’은 우리 사회 급격한 변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정부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사고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이 된 세계화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여전히 진부한 관념에 갇혀 있다. 이주민들을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고 다문화 정책 역시 그들을 소외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통한 경제력 상승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결혼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근본 이유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들은 빈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초청장 한 장에 의지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br>\n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만들어 낸 ‘순혈주의’에 익숙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운명으로 엮인 순수한 혈연 공동체라는 의식은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혼이주민에게는 국적이 다른 두 가족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족, 그 가족을 구원할 부유한 한국의 가족.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모 형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우리가 되기 위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br>\n<br>\n촬영 대상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카메라 앞에 세우는 문제였다. 흔쾌히 촬영에 응하는 분도 있었지만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과 결혼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한다든지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촬영은 전적으로 남편이 결정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거니와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결혼 초기의 이주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대리되고 중계되는 삶을 산다고 할 정도로 주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주도권은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걸러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의 권력이 더해져 이중의 고통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br>\n그 단적인 예는 국적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에서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내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다. 우선 결혼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막상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국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떠나갈까 봐 남편이 아내의 국적 취득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br>\n촬영은 연출을 최소화함으로써 촬영 대상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는데,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 등에 유의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속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집에는 그들의 삶과 상이한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스며들어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입는 옷, 집을 꾸미는 방식, 소품의 종류와 배치에 유념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붙여 놓은 한글판이었다. 어린 자녀의 한글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결혼 이주 여성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언어의 문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엄마와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과 한글로 묶인 공동 운명체였다.<br>\n촬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녀들의 고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한국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그녀들의 근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한국 생활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과 국가를 얻었지만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에 선 그녀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그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린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서경식 작가]</a>"},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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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장고향, 황설아, 베트남, 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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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초청장 고향_황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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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description=>" 안녕하세요<br>\n나의 이름은 누엔 티 응억브언이다. 1989년 베트남 하이퐁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은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보냈다.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행복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경찰이었고 어머니는 미용실을 하셨다. 고등학교 마치고 어머니 일을 도왔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면 외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에서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를 돕고 싶었다. 외국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다보니 더욱 외국에 가고 싶었다. 그 당시 고향에는 한국 남자들과 결혼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어느 날 어머니의 친구분이 집으로 놀러오셨다. 이분이“내 딸이 한국의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가끔 나를 도와주는구나. 응억브언도 한국으로 시집을 보내면 잘 살 수 있을텐데” 라고 어머님에게 말씀하셨다. 나와 어머니는 그 이모의 말씀대로 한국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였다.<br>\n국제결혼 정보회사로 한국 남자들을 만나러 갔었던 1월 21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날씨가 춥고 길은 아주 멀었다. 크고 화려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나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음을 곧 알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베트남 여성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냥 구경삼아 온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예쁜 여자들이 너무 많아, 한국 남자들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회사의 면접을 보듯이 한명씩 한국 남자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이야기만 하고 나왔다. 기다리던 끝에 나의 차례가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가니 통역원 한 명과 한국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그 한국 남자가 현재 나의 남편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운명처럼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하롱베이로 며칠 동안 신혼여행을 갔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간 날, 나는 많이 울었다. 비록 우리부부가 함께 있었던 시간이 몇 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떠나자 나는 많이 슬펐다. 남편이 한국으로 가고 매일매일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어야 남편과 통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소통 안 되어 “사랑해요” 라고만 이야기했다. 서류가 정리되고 5개월 후에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는 남편, 시부모님께 함께 살게 됐다. 남편의 집은 도시가 아니었고 아마 뭐..읍이라고 했다. 베트남의 집은 도시에 있어서 늘 시끄럽고 재미있었는데, 남편의 집은 아주 조용하고 심심하였다. 그러나 남편과 시부모님이 나를 사랑해주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특히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정말 답답했다. 날씨는 춥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힘들고 베트남의 가족들도 그리워 당장이라도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었다.<br>\n시간이 지나 결혼이주여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복지관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복지관센터에는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처럼 한국에 시집 온 고향 여성들이 많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낮에는 하얀 백지에 글을 쓰듯이 한국어를 공부했고, 오후에 집안 살림을 도왔다. 시어머니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는데 필요한 한국음식 조리법과 한국의 풍습에 대하여 꼼꼼히 가르쳐 주셨다.<br>\n어느새 3년이 지났다. 나의 한국생활은 많이 적응되어 전처럼 힘들지 않다. 특히 사랑하는 공주를 얻게 되어 너무 기쁘다. 나와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딸 때문에 웃는 일이 많아지고 집안은 늘 따뜻해졌다. 요즘은 딸을 어린이집에 맡겨두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고생스러웠지만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손님과 대화를 하니 한국어 실력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식당의 주인도 좋으신 분이고 나를 자신의 딸처럼 생각해줘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한국의 이름도 얻고 운전면허증도 땄다. 작년에는 가족모두 베트남으로 가서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아주 자랑스럽고 행복했다. 나는 한국의 생활에 정말 만족하고 있다. 그동안 시부모님과 남편은 나를 배려해주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행복하고 따뜻한 나의 가족을 만들어준 남편과 시부모님께 늘 감사하다. 한국의 살고 있는 모든 결혼이주 여성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한다.<br>\n베트남과 한국의 가족들 모두 항상 건강하시고, 나의 딸이 착한 손녀, 착한 딸이 되기를 바래본다. \t\t\t\t\t\tNGUYEN THI NGOC PHUONG<br>\n\t\t\t\t\t\t\t황설아<br>\n<br>\n남편과 아들 옆에서 늘 행복한…….VO THI THU<br>\n2012년 12월 25일<br>\n보티투<br>\n<br>\nartist statement<br>\n단일민족, 백의민족의 동질성에 자긍심을 갖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이주가 보편화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형성될수록 우리의 의식은 완고하리만큼 배타적 경계를 유지한다. 뿌리 깊은 ‘민족주의’ 때문이다.<br>\n우연히 ‘외국인 주부 한글 교실’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인 주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유도하는 다문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외국인 주부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이었다. 우리와 다른 외모, 어눌한 발음은 타 문화권 출신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고,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br>\n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쉽사리 동화되지 못한 그녀들은 자신의 특수한 삶의 방식을 존중받지 못한 채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소수자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녀들의 정체성을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이른 지점이다.<br>\n급속한 경제 발전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비싼 임금은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남아선호 사상에 의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여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간호사 파견, 기지촌 여성 문제, 아메리칸드림 등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br>\n<br>\n이 작업의 큰 틀은 우리 사회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국가, 민족 등을 포괄하는 다문화주의지만, 세부적인 작업의 의도는 우리 사회와 아시아에 속한 제3세계권 여성의 ‘결혼’ ‘이주’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정체성’이다.<br>\n인간은 관습화 되고 사회화된 결혼 제도를 통해 생리 본능, 즉 자신의 유전자를 영속시킨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생리적 욕망뿐 아니라 ‘심리적 이끌림-사랑’이라는 감정 변화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들은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드물다. 10~20분의 짧은 대면으로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평생 자신의 삶을 의지할 남편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혼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의 유형을 만들고 있다.<br>\n‘다문화 가족’은 우리 사회 급격한 변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정부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사고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이 된 세계화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여전히 진부한 관념에 갇혀 있다. 이주민들을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고 다문화 정책 역시 그들을 소외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통한 경제력 상승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결혼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근본 이유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들은 빈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초청장 한 장에 의지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br>\n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만들어 낸 ‘순혈주의’에 익숙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운명으로 엮인 순수한 혈연 공동체라는 의식은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혼이주민에게는 국적이 다른 두 가족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족, 그 가족을 구원할 부유한 한국의 가족.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모 형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우리가 되기 위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br>\n<br>\n촬영 대상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카메라 앞에 세우는 문제였다. 흔쾌히 촬영에 응하는 분도 있었지만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과 결혼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한다든지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촬영은 전적으로 남편이 결정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거니와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결혼 초기의 이주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대리되고 중계되는 삶을 산다고 할 정도로 주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주도권은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걸러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의 권력이 더해져 이중의 고통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br>\n그 단적인 예는 국적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에서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내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다. 우선 결혼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막상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국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떠나갈까 봐 남편이 아내의 국적 취득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br>\n촬영은 연출을 최소화함으로써 촬영 대상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는데,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 등에 유의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속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집에는 그들의 삶과 상이한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스며들어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입는 옷, 집을 꾸미는 방식, 소품의 종류와 배치에 유념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붙여 놓은 한글판이었다. 어린 자녀의 한글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결혼 이주 여성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언어의 문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엄마와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과 한글로 묶인 공동 운명체였다.<br>\n촬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녀들의 고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한국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그녀들의 근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한국 생활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과 국가를 얻었지만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에 선 그녀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그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린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서경식 작가]</a>"},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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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장고향, 보티투, 베트남, 20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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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초청장 고향_보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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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제가 결혼을 하니 호치민으로 오십시요”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셨다. 나는 나의 미래와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해 결혼을 허락해주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2008년 6월 5일에 결혼식을 올렸다.<br>\n결혼식을 올리고 4개월 후 모든 서류가 준비되고 나는 고향을 떠나 그해 10월 10일 한국 땅에 도착했다. 한국의 생활은 예상과 달랐다. 의사소통은 안 되었고 문화도 다르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견디고 노력했다.<br>\n 2009년 12월 아들을 태어났다. 남편과 아들에게 모든 사랑을 주었고, 비로소 행복을 느꼈다. 아들이 태어난지 1년 후, 2011년 1월 남편, 아들과 함께 베트남의 가족에게 돌아갔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우리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다. 2개월동안 베트남에 서 휴식을 취하고, 2011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평소에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다. 한국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근처에 있는 빵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항상 바쁘고 힘들게 살지만 참 행복하다. 왜냐하면 내가 벌어서 남편과 친정 부모님을 도와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br>\n며느리의 역할, 아내의 역할, 엄마의 역할을 하기가 힘들지만 나를 늘 사랑해주는 남편 그리고 아들이 있어서 큰 힘이 된다. 나는 힘들어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다. 나와 나의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면.<br>\n<br>\n남편과 아들 옆에서 늘 행복한…….VO THI THU<br>\n2012년 12월 25일<br>\n보티투<br>\n<br>\nartist statement<br>\n단일민족, 백의민족의 동질성에 자긍심을 갖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이주가 보편화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형성될수록 우리의 의식은 완고하리만큼 배타적 경계를 유지한다. 뿌리 깊은 ‘민족주의’ 때문이다.<br>\n우연히 ‘외국인 주부 한글 교실’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인 주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유도하는 다문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외국인 주부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이었다. 우리와 다른 외모, 어눌한 발음은 타 문화권 출신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고,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br>\n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쉽사리 동화되지 못한 그녀들은 자신의 특수한 삶의 방식을 존중받지 못한 채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소수자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녀들의 정체성을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이른 지점이다.<br>\n급속한 경제 발전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비싼 임금은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남아선호 사상에 의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여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간호사 파견, 기지촌 여성 문제, 아메리칸드림 등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br>\n<br>\n이 작업의 큰 틀은 우리 사회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국가, 민족 등을 포괄하는 다문화주의지만, 세부적인 작업의 의도는 우리 사회와 아시아에 속한 제3세계권 여성의 ‘결혼’ ‘이주’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정체성’이다.<br>\n인간은 관습화 되고 사회화된 결혼 제도를 통해 생리 본능, 즉 자신의 유전자를 영속시킨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생리적 욕망뿐 아니라 ‘심리적 이끌림-사랑’이라는 감정 변화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들은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드물다. 10~20분의 짧은 대면으로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평생 자신의 삶을 의지할 남편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혼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의 유형을 만들고 있다.<br>\n‘다문화 가족’은 우리 사회 급격한 변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정부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사고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이 된 세계화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여전히 진부한 관념에 갇혀 있다. 이주민들을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고 다문화 정책 역시 그들을 소외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통한 경제력 상승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결혼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근본 이유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들은 빈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초청장 한 장에 의지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br>\n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만들어 낸 ‘순혈주의’에 익숙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운명으로 엮인 순수한 혈연 공동체라는 의식은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혼이주민에게는 국적이 다른 두 가족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족, 그 가족을 구원할 부유한 한국의 가족.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모 형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우리가 되기 위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br>\n<br>\n촬영 대상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카메라 앞에 세우는 문제였다. 흔쾌히 촬영에 응하는 분도 있었지만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과 결혼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한다든지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촬영은 전적으로 남편이 결정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거니와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결혼 초기의 이주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대리되고 중계되는 삶을 산다고 할 정도로 주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주도권은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걸러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의 권력이 더해져 이중의 고통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br>\n그 단적인 예는 국적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에서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내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다. 우선 결혼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막상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국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떠나갈까 봐 남편이 아내의 국적 취득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br>\n촬영은 연출을 최소화함으로써 촬영 대상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는데,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 등에 유의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속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집에는 그들의 삶과 상이한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스며들어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입는 옷, 집을 꾸미는 방식, 소품의 종류와 배치에 유념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붙여 놓은 한글판이었다. 어린 자녀의 한글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결혼 이주 여성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언어의 문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엄마와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과 한글로 묶인 공동 운명체였다.<br>\n촬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녀들의 고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한국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그녀들의 근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한국 생활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과 국가를 얻었지만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에 선 그녀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그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린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서경식 작가]</a>"},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http://geonhi.com/korean/초청장-고향_멀린-2010/
초청장 고향, 멀린, 필리핀, 20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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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초청장 고향_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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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낯설었다. 음식과 날씨,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외로움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시부모님과 남편의 도움으로 나는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 같은 간단한 한국말을 배웠다. 한국에서는 인사를 잘 해야 하며 특히 어르신들에게는 더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아 그리고 김치! 그 냄새란… 그 때는 입에도 못 대었는데 지금은 김치를 정말 좋아한다. 물건을 살 때 “이모, 이거 얼맙니까?” 하고 묻는 법도 배웠다. 이 모든 말들을 배우고 암기할 때마다 신이 났다.<br>\n\t2009년 3월 4일, 나는 우리 아들 김진호를 낳았다.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나는 ‘내꺼’라고 부른다. 나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물론 첫 아이라 힘은 들지만 시어머니께서 항상 아이 돌보기를 도와주시고, 또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너무나 행복해졌고, 그동안의 약간의 슬픔이 모두 기쁨으로 바뀌었다. 2011년 10월 5일, 나는 둘째를 낳았다. 아름다운 공주님 김예은, 이제 15개월 되었다. 슬하에 두 명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br>\n\t평범한 삶을 꿈꾸던 필리핀의 한 교외의 소녀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br>\n<br>\nartist statement<br>\n단일민족, 백의민족의 동질성에 자긍심을 갖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이주가 보편화되고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형성될수록 우리의 의식은 완고하리만큼 배타적 경계를 유지한다. 뿌리 깊은 ‘민족주의’ 때문이다.<br>\n우연히 ‘외국인 주부 한글 교실’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외국인 주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자연스레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유도하는 다문화 정책 프로그램이었다. 외국인 주부 대부분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이었다. 우리와 다른 외모, 어눌한 발음은 타 문화권 출신임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식이고,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br>\n우리 사회의 부정적 시선에 쉽사리 동화되지 못한 그녀들은 자신의 특수한 삶의 방식을 존중받지 못한 채 그 경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소수자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녀들의 정체성을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하기에 이른 지점이다.<br>\n급속한 경제 발전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와 상대적으로 비싼 임금은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남아선호 사상에 의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외국인 신부를 맞아들여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간호사 파견, 기지촌 여성 문제, 아메리칸드림 등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br>\n<br>\n이 작업의 큰 틀은 우리 사회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국가, 민족 등을 포괄하는 다문화주의지만, 세부적인 작업의 의도는 우리 사회와 아시아에 속한 제3세계권 여성의 ‘결혼’ ‘이주’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정체성’이다.<br>\n인간은 관습화 되고 사회화된 결혼 제도를 통해 생리 본능, 즉 자신의 유전자를 영속시킨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생리적 욕망뿐 아니라 ‘심리적 이끌림-사랑’이라는 감정 변화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들은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드물다. 10~20분의 짧은 대면으로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평생 자신의 삶을 의지할 남편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혼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의 유형을 만들고 있다.<br>\n‘다문화 가족’은 우리 사회 급격한 변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정부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사고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이 된 세계화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여전히 진부한 관념에 갇혀 있다. 이주민들을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고 다문화 정책 역시 그들을 소외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통한 경제력 상승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결혼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근본 이유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들은 빈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초청장 한 장에 의지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br>\n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만들어 낸 ‘순혈주의’에 익숙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운명으로 엮인 순수한 혈연 공동체라는 의식은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혼이주민에게는 국적이 다른 두 가족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족, 그 가족을 구원할 부유한 한국의 가족.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모 형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우리가 되기 위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br>\n<br>\n촬영 대상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카메라 앞에 세우는 문제였다. 흔쾌히 촬영에 응하는 분도 있었지만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과 결혼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한다든지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촬영은 전적으로 남편이 결정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거니와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결혼 초기의 이주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대리되고 중계되는 삶을 산다고 할 정도로 주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주도권은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걸러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의 권력이 더해져 이중의 고통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br>\n그 단적인 예는 국적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에서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내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다. 우선 결혼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막상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국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떠나갈까 봐 남편이 아내의 국적 취득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br>\n촬영은 연출을 최소화함으로써 촬영 대상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는데,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 등에 유의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속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집에는 그들의 삶과 상이한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스며들어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입는 옷, 집을 꾸미는 방식, 소품의 종류와 배치에 유념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붙여 놓은 한글판이었다. 어린 자녀의 한글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결혼 이주 여성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언어의 문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엄마와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과 한글로 묶인 공동 운명체였다.<br>\n촬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녀들의 고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한국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그녀들의 근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한국 생활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과 국가를 얻었지만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에 선 그녀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그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린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서경식 작가]</a>"},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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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장,엔티(베트남),부산,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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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근
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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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이르렀다. 독일 간호사 파견, 기지촌 여성 문제, 아메리칸드림 등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br>\n<br>\n이 작업의 큰 틀은 우리 사회의 가장 당면한 과제인 국가, 민족 등을 포괄하는 다문화주의지만, 세부적인 작업의 의도는 우리 사회와 아시아에 속한 제3세계권 여성의 ‘결혼’ ‘이주’ ‘가족’ 그리고 ‘그녀들의 정체성’이다.<br>\n인간은 관습화 되고 사회화된 결혼 제도를 통해 생리 본능, 즉 자신의 유전자를 영속시킨다. 하지만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생리적 욕망뿐 아니라 ‘심리적 이끌림-사랑’이라는 감정 변화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은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진 속 주인공들은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드물다. 10~20분의 짧은 대면으로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될 사람을 결정하고, 평생 자신의 삶을 의지할 남편을 결정한다. 한순간의 운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결혼의 형태가 우리 사회에 새로운 가정의 유형을 만들고 있다.<br>\n‘다문화 가족’은 우리 사회 급격한 변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최근 한국 사회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성과 차이를 포괄하는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정부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의 사고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이 된 세계화에 부응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의식과 사회 구조는 여전히 진부한 관념에 갇혀 있다. 이주민들을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으로 범주화하고 다문화 정책 역시 그들을 소외시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통한 경제력 상승은 이주노동자와 함께 결혼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근본 이유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결혼이주민들은 빈곤을 탈피하는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을 위해 또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초청장 한 장에 의지해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br>\n우리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만들어 낸 ‘순혈주의’에 익숙하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운명으로 엮인 순수한 혈연 공동체라는 의식은 큰 변함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를 더욱 공고히 한다. 결혼이주민에게는 국적이 다른 두 가족이 있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가족, 그 가족을 구원할 부유한 한국의 가족.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 자신의 희생으로 가족들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부모 형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우리가 되기 위한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br>\n<br>\n촬영 대상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작 어려운 것은 카메라 앞에 세우는 문제였다. 흔쾌히 촬영에 응하는 분도 있었지만 꺼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분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과 결혼한 것을 내심 부끄러워한다든지 드러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촬영은 전적으로 남편이 결정했다.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거니와 의사 결정의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최종 결정은 언제나 남편의 몫이었다. 결혼 초기의 이주여성들은 남편에 의해 대리되고 중계되는 삶을 산다고 할 정도로 주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남편의 주도권은 외부의 차별적 시선을 걸러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가부장의 권력이 더해져 이중의 고통이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br>\n그 단적인 예는 국적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속에서 한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내만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들이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절차가 까다롭다. 우선 결혼 후 일정 시간이 지나야 신청 자격이 주어지고, 막상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국적을 얻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가 국적을 취득하면 떠나갈까 봐 남편이 아내의 국적 취득에 소극적인 경우도 있다.<br>\n촬영은 연출을 최소화함으로써 촬영 대상자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고자 했는데, 카메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나는 가족 간의 관계와 질서 등에 유의했다. 이러한 가족 관계 속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집에는 그들의 삶과 상이한 문화가 서로 부딪히고 스며들어 있었는데, 집 안에서 입는 옷, 집을 꾸미는 방식, 소품의 종류와 배치에 유념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실에 붙여 놓은 한글판이었다. 어린 자녀의 한글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결혼 이주 여성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언어의 문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엄마와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한국과 한글로 묶인 공동 운명체였다.<br>\n촬영을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녀들의 고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한국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물음은 그녀들의 근원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과 동남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한국 생활에 쉽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그녀들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과 국가를 얻었지만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경계에 선 그녀들, 디아스포라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제 그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시선을 돌린다.<br>\n<br>\narticle<br>\n<a href=\"http://geonhi.com/korean/wp-content/uploads/2019/12/1.%EC%B4%88%EC%B2%AD%EC%9E%A5%EC%84%9C%EA%B2%BD%EC%8B%9D.pdf\">[서경식 작가]</a>\n"}, :artist=>{:title=>"이동근", :description=>"1966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 대학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적부터 주변부로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에서에서 진행되는 이산의 과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난민에 주목하고 다큐멘터리 직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결혼이주여성과 그들의 가족, 탈북민 등 동시대의 디아스포라에 관하여 심층적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 2013 포함하여 열 번의 개인전과 PHOTOVILLE2018, New York, USA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제10회 일우사진상 다큐멘터리 부분 수상,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로 선정되었다. 부산대학교, 부경대학교, 부산교육대학교, 경성대학교, 부산시립미술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사진관련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외래교수로 재직 중이다.<br>\n<br>\n[개인전]<br>\n2019 아리랑예술단(유랑극장), 일우스페이스, 서울<br>\n2017 초청장(An Invitation), 서학동 사진관, 전주<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공간 이다, 하남<br>\n2017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사진공간 배다리, 인천<br>\n2017 초청장, BCUT갤러리, 서울<br>\n2016 흐르는 길, 킴스아트필드 미술관, 부산<br>\n2016 모던시티-좌천아파트, 예술지구_p, 부산<br>\n2013 초청장(An Invitation),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2 Joy Castle, 1839갤러리, 순천<br>\n2009 Joy Castle, 경성대학교 미술관, 부산<br>\n<br>\n[그룹전]<br>\n2019 돌아보다, 부산 자원순환협력센터 아트스페이스, 부산<br>\n2019 PHOTOVILLE2019, New York, USA<br>\n2019 세창냉동 테스트베드, 세창냉동, 울산<br>\n2019 Memoirs of BUSAN,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9 이웃하진 않은 이웃, KF갤러리, 서울<br>\n2018 PHOTOVILLE2018, New York, USA<br>\n2018 침묵을 흔들다. 40계단 문화관, 부산<br>\n2018 부산리턴즈, F1963, 부산<br>\n2017 2017 리수이 사진축제, 리수이 ,중국<br>\n2017 경계 BOUNDARY, KT&G 상상마당 대치 아트홀, 서울<br>\n2016 홈그라운드, 청주시립미술관, 청주<br>\n2016 극장전, 송정역 시민갤러리, 부산<br>\n2016 제3회 수원국제사진축제, 수원<br>\n2016 골목들, 부산시립미술관 용두산미술전시관, 부산<br>\n2016 도시의 풍경-집을 만나다, 아트스페이스 누리봄, 부산<br>\n2016 사진적 카이로스 KT&G 상상마당 아트센터 갤러리, 춘천<br>\n2016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6 규레이팅 및 전시, 상명대학교, 서울<br>\n2015 극장전, 보따리 170, 부산<br>\n2015 회동담화, 예술지구_p, 부산<br>\n2015 Family Album. LIG ART SPACE. 서울<br>\n2015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문화예술회관, 경기도 안산<br>\n2015 한국사진학회 국제영상사진전 photo speak 2015 큐레이팅 및 전시, 프랑스 문화원, 부산<br>\n2014 1839 Photography Residence, 상상문화 발전소, 순천<br>\n2014 동상이몽, 예술지구_p, 부산<br>\n2014 새집에 보따리를 풀다, ㅇ + ㅅ빌딩, 부산<br>\n2014 멋부산, 민주공원전시실, 부산<br>\n2014 Two Dimensional Dancing, Vision Fine Art Gallery, AZ, USA<br>\n2013 변주된 풍경들, 신세계 갤러리, 부산<br>\n2013 사진 미래색2013, 고은사진미술관, 부산<br>\n2013 사진과 사진, KT&G 상상마당 갤러리, 서울<br>\n2013 기억의 저편, 부산예술회관, 부산<br>\n2012 남해안 프로젝트, 1839갤러리, 순천<br>\n2012 산복도로 다시보기 프로젝트‘기억의 풍경’, 좌천시민아파트, 부산<br>\n2008 대구사진비엔날레 기획전 숲, 경북대학교미술관, 대구<br>\n2008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산시립미술관, 부산<br>\n2008 흙의 노래,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영월그리기, 동강사진박물관, 영월<br>\n2007 이데올로기로써의 몸, 영광갤러리, 부산<br>\n2007 동강사진축제 거리설치전, 영월<br>\n2007 오래된 정원, 영광갤러리, 부산<br>\n2006 밤, 부산시립미술관, 시민갤러리<br>\n<br>\n[소장]<br>\nKT&G 상상마당<br>\n영월사진박물관<br>\n<br>\n[수상]<br>\n2018 제10회 일우사진상 수상<br>\n2012 제5회 KT&G 상상마당 한국사진가 지원프로그램 최종작가 수상\n"}}